연구원 소개

01동궐도

연혁

규장각의 역사

  • 1776~1945조선시대 규장각의
    성립과 전개
  • 1946~2005서울대학교
    규장각
  • 1969~2005서울대학교
    한국문화연구소
  • 2006~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奎星 (규성), 문장을 관장하는 별

왕립 학술기관
'규장각'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의 역사적 기원은 조선후기의 왕립 학술기관이었던 규장각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규장각奎章閣’의 ‘奎’자는 천체天體 이십팔수二十八宿의 하나로 ‘문장을 주관하는 별자리’의 이름이다. 고대 중국에서 제왕帝王의 글을 ‘규장奎章’ 이라 부른 연유로, 조선에서 왕의 초상화·친필·저술·인장 등을 보관하는 건물을 규장각이라 이름 지었다.


1776년 정조正祖가 제22대 군주로 즉위한 직후 정식 국가기관으로 발족한 규장각은 역대 왕의 글·글씨·그림, 왕실의 족보 등을 보관 하는 기능뿐만 아니라, 전임專任 문신들이 학문을 연구하고 왕의 자문에 응하는 기능, 국정 운영의 참고 자료인 국내외 전적典籍을 수집 ·보관하는 기능, 서적을 출판하는 기능을 담당하였고, 한 때는 각신閣臣들이 왕의 친위세력을 형성하면서 국정 전반에 관여하기도 했다.

규장각 현판
숙종대왕 어필

규장각과 정조 시대

정조대왕태실가봉의궤

일찍이 1463년(세조 9)에 양성지梁誠之가 역대 군주의 글을 보관하는 규장각의 설치를 건의하였으나 실행되지 않았다. 1694년(숙종 20)에 이르러 역대 왕의 친필과 저술을 보관하는 작은 건물을 종부시宗簿寺 부속으로 짓고, 국왕의 친필로 쓴 ‘奎章閣’ 현판을 처음으로 달았다. 1762년(영조 38) 후일의 정조는 왕세손王世孫에 봉해지면서 거처를 경희궁慶熙宮으로 옮기고 15년간 그곳에 머물렀다. 세손은 경희궁에 학문을 연구하고 논하는 장소로 주합루宙合樓와 존현각尊賢閣을 세우고, 별도로 정색당貞賾堂을 지어 서재로 사용하였다. 1776년(영조 52) 3월 영조의 승하로 왕위에 오른 정조는 본궁本宮인 창덕궁 금원禁苑에 규장각 창건을 명하였다. 9월에 2층 건물이 완성 되어 경희궁에 설치하였던 주합루를 2층으로 이전하였다. 그 건물의 아래층을 어제존각御製尊閣이라 하여 역대 선왕의 친필, 저술 등을 보관하였고, 별도로 서향각書香閣을 지었다. 곧 어제존각을 규장각으로 이름을 바꾸어 정조의 어진御眞, 어제御製, 어필御筆, 인장 등을 보관하고, 그곳에 보관되었던 선왕의 유품들은 봉모당奉謨堂을 새로 지어 옮겼다. 또한 주합루 일대에 열고관閱古觀, 개유와皆有窩, 서고西庫 등의 건물을 지어 국내외 서적을 수집 보관하였다. 그 때 처음으로 제학提學, 직제학直提學, 직각直閣, 대교待敎 등의 각신 閣臣을 임명함으로써 규장각은 나라의 정식 기구로 발족하였다. 정조는 규장각을 단지 역대 왕의 유품을 보관 관리하는 기구로 창설한 것이 아니었다. 당시 당리당략黨利黨略에 몰두하는 조정 신하들의 풍조를 일신하고 국정을 바로 잡아나가기 위한 목적에서 규장각을 설치 하고, 유능한 선비를 발탁 임명하여 경사經史를 논하고 정사政事의 자문에 응하게 하였다.


규장각이 설치된 1776년 12월에는 서적의 출판 업무를 담당하는 교서관校書館을 규장각의 외각外閣으로 소속시켜 서책을 간행하게 하였다. 교서관에서 간행한 책들은 내각판內閣板 혹은 내각본內閣本이라 불렸는데, 판형이 정교하고 지질과 제본이 우수하여 당대當代부터 애장 愛藏되었다. 교서관 책판 1만 8천여 매가 현재 규장각에 소장되어 있다.

정조는 1781년 2월부터 37세 이하의 초급 문관 가운데 재능이 있는 사람을 선발하여 재교육시키는 프로그램인 초계문신抄啓文臣 제도를 시행하였다. 정조는 교육과정을 규정한 『문신강제절목文臣講製節目』을 만들고 이들을 대상으로 경전과 역사서 공부 및 문장 짓기를 집중적으로 수련하게 하고 이에 대한 시험도 치렀다. 선발된 초계문신은 당대의 최고 인재들이자 정조의 최측근으로서 개혁 정치의 실무자로 활동하였다. 1782년(정조 6)에는 강화도에 외규장각外奎章閣을 지어 효종대 이래 강화도의 내군기內軍器에 보관하여 온 역대 군주의 친필, 교명敎命, 왕실의 족보인 선보璿譜 등을 옮겼다.

정조 사후
규장각의 부침 浮沈

1800년(정조 24) 정조가 승하하고 순조가 즉위한 후부터 규장각의 기능은 급속히 약화되었다. 초계문신 제도로 양성된 정조의 친위 세력이 1년이 못되어 와해되었고, 규장각이 누렸던 국정 최고자문기관의 기능도 완전히 상실하였다. 규장각의 각신閣臣은 계속 임명되었으나 명예직 이상의 큰 의미가 없었고, 부여된 임무는 역대 왕의 저술과 친필 등을 보관하는 업무로 제한되었다. 이 시기에는 정직正職의 각신들보다 잡직雜織으로 서얼庶孼 출신이 임명되었던 검서관檢書官들의 임무가 컸다. 이들은 『일성록日省錄』을 편찬하는 일을 계속 수행하였고, 중요한 서적의 출판시 감인監印(서적에 착오가 없는 지 확인하는 일)을 담당하였다.

정조의 문집
홍재전서

1863년(고종 즉위)에 흥선대원군이 집정하면서 규장각 현판이 종친부宗親府로 옮겨졌다. 그로부터 규장각의 전통적인 기능인 역대 왕의 저술, 친필, 초상화, 선원보첩璿源譜牒 등을 보관하는 임무를 종친부에서 수행하고 규장각에서는 주로 도서의 관리 임무만 담당하게 되었다. 대원군은 세도정치勢道政治로 실추된 종친부의 세력을 신장하기 위한 목적의 일환으로 이러한 조치를 취했던 것이다. 1866년(고종 3) 발생한 병인양요丙寅洋擾 당시 강화도를 점령한 프랑스군은 외규장각 건물과 소장도서 5천여 책을 방화 파괴하면서 의궤儀軌 3백여 책을 약탈해 갔다. 파리 국립도서관에 보관되었던 위 외규장각 의궤는 우리 정부와 프랑스 정부 사이의 반환 교섭을 통해 2011년 장기임대 형식으로 국내에 돌아와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1868년(고종 5) 경복궁이 중건되면서 규장각의 기능도 대부분 경복궁에서 수행하게 되었고, 관리하던 도서들도 대부분 경복궁의 부속 건물로 이전되었다. 그러나 얼마 후 다시 창덕궁으로 옮겼다. 1873년(고종 10) 이후 개화사상의 맹아와 더불어 규장각 도서에 대한 관심이 증대됨에 따라 규장각의 위상도 잠시 높아졌다. 이 때 『이문원서목摛文院書目』 등 규장각이 소장한 책들의 목록이 편찬 간행되었고, 개항 이후에는 상해上海에서 서양의 책들도 상당히 구입하여 규장각 부속 건물에 비치하였다. 1894년(고종 31) 갑오개혁으로 왕실의 권한과 기능이 축소되면서 규장각은 신설된 궁내부宮內府에 귀속되었고, 이듬해에는 규장원奎章院으로 개칭되어 궁내부 산하 6개 기관 중 하나로 격하되는 변화를 겪었다. 그러나 아관파천俄館播遷 이후 정권이 바뀌고 왕실의 권한이 회복되면서 1897년(고종 34) 궁내부 관제가 개편될 때 규장원奎章院이 다시 규장각奎章閣으로 환원되고 기능도 회복되어 근대화 사업과 관계되는 신서新書를 다수 구입 관리하였다.

국왕 즉위
고종대례의궤

일제의
규장각 도서 장악

승정원일기

고종이 강제 퇴위하고 순종이 즉위한 직후인 1907년(융희 1) 11월의 관제官制 개정으로 규장각의 기능이 대폭 변경되었다. 규장각은 전래의 기본 임무인 역대 왕의 저술과 유물을 보관하는 업무 이외에 종친부와 홍문관의 업무를 통괄 담당하게 되었다. 우선 직제가 칙임勅任의 대제학大提學 1인과 제학提學 10인 이내, 주임奏任의 부제학副提學 10인 이내 외에고문으로 칙임의 지후관祇侯官 10인으로 확대되었는데, 당시 최고의 중신重臣들 중에서 선임되었다. 규장각의 주업무가 국유國有 도서 관리가 되면서, 홍문관弘文館, 시강원侍講院,집옥재集玉齋, 춘추관春秋館 등에 소장되었던 책들과 지방의 사고史庫에 보관되었던 전적典籍등 도합 10여만 권이 규장각 도서로 통합되어 ‘제실도서帝室圖書’로 명명되었다. 이때『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등이 규장각으로 이관되었다. 1910년 강제병합으로 규장각은 폐지되고, 제실도서帝室圖書는 잠시 이왕직李王職에서 관리하였으나, 이듬해 1911년 11월 조선총독부 취조국取調局에서 인수하고, 역대 왕의 어제, 어필, 선원보첩 등은 창경궁 내에 일본식 건물 봉모당奉慕堂과 보각譜閣을 지어 보관하고 이왕직에서 관리하게 하였다. 1912년에는 제실도서를 참사관분실參事官分室에서 관리하게 되었고 도서의 명칭을‘규장각도서奎章閣圖書’로 정하였다.1923년 경성제국대학京城帝國大學이 설립된 후, 조선총독부는 규장각도서를 경성제국대학으로 이관하기로 방침을 정하고, 1928년부터 1930년 사이에 3차에 걸쳐 이관하였다. 이 때 조선총독부 학무국에서 경성제국대학 부속도서관으로 이관된 책이 총161,561 책이었으며, 그 중 일반동양도서로 분류된 20,648책을 제외한 140,913책이 규장각도서로 지정되었다.


규장각도서가 경성제국대학으로 이관된 후 창덕궁 내의 규장각 건물들은 수난을 겪게 되었다. 이문원. 文院 자리에는 일제의 창덕궁 경찰서가 들어섰고, 대유재大酉齋와 소유재小酉齋에는 검도장이 들어섰다. 이안각移安閣과 주합루宙合樓와 부용정芙蓉亭은 남아서 오늘날 창덕궁 후원 안의 주요 명소가 되어 있으나, 열고관閱庫觀, 개유와皆有窩, 서고西庫 등의 부속건물들은 헐리고 말았다.

조선왕조실록

서울대학교의
규장각 도서 접수와
정리

비변사등록
국보 지정

1945년 8월 광복 후 1년 후인 1946년 10월에 서울대학교가 개교하였다. 그 과정에서 구 경성제국대학이 보관해온 규장각도서도 규모나 보관 장소의 변경 없이 소관처만 서울대학교 부속도서관으로 바뀌었다.


1950년 6월 25일 발발한 한국전쟁으로 규장각도서도 큰 위기를 맞았다. 북한군의 급작스러운 남침으로 이루어진 1차 서울 점령 시에는, 규장각뿐만 아니라 우리 사회 거의 모든 분야에서 피난 대책이 전무했다. 그 기간 동안에 규장각도서의 일부가 포장, 반출되는 사건이 있었으나 다행히 원상 복구되었다. 그 때 창경궁 내 장서각藏書閣에 소장되었던 왕실 도서 중 『조선왕조실록』, 통칭 적상산본赤裳山本이 북한으로 이송되었다. 1950년 9월 28일 유엔군이 서울을 탈환하였다가 3개월 후인 1951년 1월 4일 후퇴함으로써 북한군이 서울을 다시 점령하였다. 1.4 후퇴를 목전에 둔 급박한 시점인 1950년 12월 10일부터 28일 사이에 3차에 걸쳐 규장각도서 중 『조선왕조실록』, 『비변사등록』, 『일성록』, 『승정원일기』 등, 후일 모두 국보로 지정된 전적 8,657책이 군용 트럭에 실려 전시 수도戰時首都 부산으로 이송되었다. 전란 중에 이 도서들은 포장된 채로 부산의 관재처 창고, 경남대한부인회 창고, 경남도청 창고 등을 전전하다가 정부가 환도한 지 수개월 후인 1954년 6월에 서울대학교 도서관으로 돌아왔다. 다행히 서울에 남아 있던 도서들도 무사하였다. 1960년대에 들어서서야 규장각도서에 대한 본격적인 정리작업이 시작되었다. 1962년 11월에 규장각도서의 보존, 관리 및 활용에 대한 사항을 심의하는 규장각도서위원회가 총장 직속의 기관으로 설치되었다. 곧 『규장각도서한국본서명색인奎章閣圖書韓國本書名索引』 1부 4권이, 이듬해 1963년 8월에는 『규장각도서중국본서명색인奎章閣圖書中國本書名索引』 1부 1책이 완성되었으며, 1964년 9월부터 1966년 6월에 이르는 1년반 남짓한 기간에 소장 고문서 52,000여건이 정리되었다.


1973년부터는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 『비변사등록備邊司謄錄』, 『일성록日省錄』, 『십칠사찬고금통요十七史纂古今通要』, 『송조표전총류宋朝標牋總類』 등의 도서가 국보로 지정되었다.

조선왕조실록
국보 지정

규장각도서관리실의 설치

1975년 서울대학교가 관악캠퍼스로 이전하면서 서울대학교 부속도서관이 확대 개편되어 명칭이 서울대학교 도서관으로 바뀌었고, 그 안에 규장각 도서 전담관리 부서인 규장각도서관리실이 설치되었다. 초대 관리실장에 사서 유동렬柳東烈 서기관이 임명되었으나, 4개월 후 법과대학 박병호朴秉濠 교수가 2대 실장으로 취임하면서부터 규장각도서의 관리책임을 교수들이 담당하게 되었다. 규장각도서는 관악캠퍼스 중앙도서관 2층에 특별 서고를 마련하여 보관하였고, 광복 이후 서울대학교가 구입한 고도서古圖書와 당시에 이미 서울대학교 도서관에 기증되어 있던 일사문고一蓑文庫, 가람문고, 상백문고想白文庫와 경제문고經濟文庫의 고도서 총합 6,380여책이 규장각도서로 분류되었고, 경복궁 회랑에 보관되었던 교서관校書館 책판 17,821장도 편입되었다. 1975년부터는 소장도서의 마이크로필름 작업을 시작하였다.

고문서

1960년대부터 시작된 규장각도서의 정리 작업의 결과가 1970년대 후반부터 출판되기 시작하였다. 1978년 10월에 『규장각도서해제奎章閣韓國本圖書解題-경·자부經·子部』 1권을 시작으로 1987년까지 8권이 완성 출판되었다. 1981년에는 『규장각도서한국본종합목록奎章閣圖書韓國本綜合目錄』 2권을, 이듬해는 중국본 종합목록을 출판하였다. 이 목록들은 학계에서 오랜 기간 기다려 온 듯 곧 품절되어 1983년에 재판되었다. 1977년에는 규장각 소장서에 대한 해제나 연구논문을 발표하는 학술지 『규장각奎章閣』을 발간하기 시작하였다. 규장각 소장 전적 중에서 『조선왕조실록』 등은 이미 일제강점기에 영인 출판된 적이 있었으나 극히 제한된 소수의 학자들만이 접할 수 있었다. 1950년대 후반부터 국사편찬위원회에서 규장각 소장 『조선왕조실록』, 『비변사등록』, 『승정원일기』를 영인 출판 보급함으로써 국학의 발전에 크게 기여하였다. 1970년대에 서울대학교 도서관에서 『몽어류해蒙語類解』 등 몇 가지 도서를 산발적으로 영인하였지만, 규장각이 본격적으로 소장 전적의 영인 보급 사업을 추진한 것은 1980년대에 들어서였다. 첫 대상으로 『일성록日省錄』이 선정되어 1982년부터 1996년까지 15년간에 총 86권으로 완간하였다. 1986년부터는 고문서古文書 영인 출판 사업도 시작하였다.

승정원일기

중앙도서관에서 독립, 신축 건물로 이전

1989년에 규장각 전용 건물이 준공되어 1990년 6월에 새 건물로 이사하고, 9월에 개관식을 거행함으로써 규장각이 중앙도서관에서 독립하여 독자적으로 발전할 터전이 마련되었다. 1992년 3월 서울대학교 설치령의 개정으로 서울대학교 중앙도서관 규장각도서관리실이 서울대학교 부속기관 규장각으로 독립하고, 초대 관장에 인문대학 국사학과 한영우韓永愚 교수가 취임하였다. 규장각 규정이 제정되고, 운영위원회가 구성되었다. 독립 기관으로서 기구가 정해지면서 도서관리와 열람 업무를 담당하는 사서와 더불어 상근 연구직 학예연구사가 임용되어 자체 인력에 의한 연구 기능을 갖추게 되었다.

규장각 전경
악학궤범
선정(善政)과 덕화(德化)를 울리다

1994년부터 서울대학교 자체 예산으로 편성되는 규장각 사업비가 대폭 증액되었고, 이보다 앞서 금호錦湖그룹에서 기금基金으로 5억원을 희사하였다. 또한 1993년부터 교육부에서 규장각을 비롯한 관련 기관을 선정하여 국학진흥을 위한 장기사업비를 계속 지원하게 된다. 사업비가 크게 늘어남에 따라 소장 도서의 보급과 보존 사업을 대폭으로 확대할 수 있게 되었고, 다수의 전문가를 동원하여 개별 도서에 대한 해제사업을 추진할 수 있었다. 또한 출판에 상당한 비용이 소요되는 각종 고지도古地圖와 의궤류儀軌類를 영인 간행하기 시작하였고, 일반 전적과 고문서들도 유별類別 총서로 기획 출판하기 시작하였다. 세월의 흐름과 더불어 자연히 마멸되어 가는 지도류와 서화류의 표구表具와 훼손된 도서의 배접褙接도 1993년부터 수행하였다. 1994년에는 마이크로필름 기자재를 구입 설치하여 규장각 건물 내에서 소장도서를 촬영하고 마이크로필름을 제작할 수 있게 되었다.


컴퓨터와 인터넷의 일반화에 따라 규장각도 전산화 사업을 추진하였다. 규장각의 제1차 전산화 대상은 당연히 소장도서의 목록이었다. 1997년 5월에 소장 도서 목록의 전산화를 완료하였고, 10월에는 한국본 도서해제의 데이터베이스를 완성하였다. 그해 11월에는 전산망(LAN) 공사가 이루어졌고, 규장각 자체의 전산실을 운영하기 시작하였다. 2000년부터 규장각은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정신문화연구원(현 한국학중앙연구원), 민족문화추진회(현 한국고전번역원)와 더불어 정보통신부가 한국전산원에 의뢰하여 추진하는 한국 역사 정보 통합시스템 구축 사업에 참여하였다. 이 사업은 관련기관이 소장하고 있는 전적을 영상(이미지) 형태로 전산화(디지털화)하고 데이터베이스를 구축하여 전산망에 공여함으로써, 연구자들이 인터넷으로 고전적古典籍에 접근하고 검색하도록 하기 위하여 국가가 방대한 예산으로 추진한 것이다.

규장각은 1990년대부터 시작한 각종의 대형 보급, 보존 사업을 계속 수행하는 한편, 위의 한국 역사 정보 통합시스템 구축 사업과 2002년부터 시작된 학술진흥재단(현 한국연구재단)의 기초학문지원사업의 하나로 선정된 국학고전연구사업 및 2003년부터 시작된 토지문기土地文記 정리사업을 추진하였다.

규장각의 사업이 대폭 확대되고 수행 인원이 증가함에 따라 기존 건물에서 업무를 수행하기에 충분한 공간의 확보가 어려워졌다. 2003년 5월에 규장각 건물의 연면적을 2배 이상으로 확장하는 공사를 착공하여 2004년 12월에 완공하였다.

공부자성적도

한국학 전문연구기관 설립과 위상 확대

한국문화연구소는 한국문화에 대한 연구를 협동적으로 수행하고 그 성과를 보급함으로써 민족문화의 계발과 대학교육의 질적 향상에 기여할 목적으로 1969년 2월 12일 문리과대학 부설기관으로 설립되었다. 한국문화연구소의 설립은 1960년대부터 본격화된 한국학 연구의 활성화를 위해 한국학 전문연구기관의 필요성이 증대됨에 따라 이룩된 소중한 결실이었다. 초대소장에는 청원운동을 주도해온 한우근(韓佑劤) 교수(국사학)가 취임하였으며 이기문(李基文) 교수(국어학)가 총무로서 활약했다.


1975년 서울대학교 종합화계획에 따라 문리과대학이 해체되고 캠퍼스가 관악으로 이전하면서, 1976년 2월에 한국문화연구소는 인문대학 부설기관으로 귀속되고연구소 사무실과 도서실을 갖추게 되었다. 1979년 7월 13일 한국문화연구소는 대통령령 제9535호에 의해 법정연구소로 승격되고, 서울대학교 직할연구소로귀속되었다. 한국문화연구소가 창립된 지 10년만에 지위의 격상을 가져온 것이다. 이에 따라 1980년 3월 비로소 공식적인 연구소운영규정이 제정되어소장 밑에 연구부장과 자료도서부장을 두고 조교를 임용할 수 있게 되었다.1988년에 들어와 행정담당자가 파견됨에 따라 연구소의 조직에 행정실이 신설되어 각종 예산집행 및 공문서의 관리가 체계화되었고, 연구소의 공간도 종래 자료도서실만 있던 상태에서 소장실, 행정실, 자료도서실로 분리되었다. 1995년 8월에는 연구소가 7동으로 이전하면서 소장실·행정실·자료실·회의실·연구실 등을 별도로 갖추게 되었다.

한국본서고

다양한 연구사업과 학술행사

연구소는 창설 이후 첫 사업으로 수준 높은 연구총서의 발간에 역점을 두어 1970년부터 한국문화연구총서(韓國文化硏究叢書)라는 이름으로 단행본을 간행하기 시작했다. 지금까지 모두 33권이 간행된 한국문화연구총서에는 한우근(韓佑劤), 이기문(李基文), 김용섭(金容燮), 박병호(朴秉濠), 김완진(金完鎭), 신용하(愼鏞廈), 조동일(趙東一), 한영우(韓永愚), 최승희(崔承熙) 등 한국학 각 분야의 대표적인 학자들의 연구업적이 포함되어 한국학연구에 새로운 활력소와 자극제의 구실을 하였다. 연구소는 1992년부터 서울대학교와 미국 스토니 브룩 소재 뉴욕주립대학교가 공동으로 추진하는 영문판 한국학연구총서 간행사업의 서울대측 주관기관이 되어, 1차 사업으로1996년까지 5년간에 걸쳐 한국의 언어, 문학, 역사, 불교, 유교, 정치, 경제, 사회, 미술, 교육, 과학 등 11개 분야에 달하는 한국학연구총서를 간행하는 사업을 진행하였다. 학술진흥재단에서 지원하는 인문학육성지원사업·기초학문육성지원사업을 신청하여 연구를 수행한 성과를 단행본으로 출간하여 국내외 한국학 연구기관에 보급하고 학문후속세대 양성을 위한 교재로 활용하기 위해 2002년에 서울대학교 출판부와 ‘한국문화연구소 한국학 공동연구총서(韓國學共同硏究叢書)’를 간행하기로 계약하여, 연구원 통합 때까지 총 7권이 간행되었다.

한국학 공동연구총서
경직도
평화롭고 한가한 농촌 풍경

1978년부터는 교내외 한국학 연구자를 초빙해 학술발표회를 갖기 시작하여 국어국문학·국사학을 비롯한 한국학 분야의 중요한 연구성과가 학계에 발표되었다. 2006년까지 총 100회에 걸쳐 개최된 학술발표회에는 국내 학자뿐 아니라 외국의 한국학 교수들도 참여하여 국제학술 교류 증진에도 크게 기여했다.


1989년 11월에는 이렇게 확대된 연구소의 역량을 바탕으로 연구소 창립 20주년 기념 학술심포지엄을 개최할 수 있었고, 이를 계기로 해마다 한두 차례씩, 2006년까지 18회의 학술토론회를 개최하였다. 학술토론회는 연구소에서 주관한 ‘규장각자료를 중심으로 한 연구’, ‘한국중세사회의 해체와 근대화과정’ 등 여러 연구사업의 성과를 발표·토론하여 대내외적으로 공유하는 계기가 되었고, 한국학술진흥재단의 ‘중점연구소 지원사업’으로 1999년부터 수행된 학제간 공동연구인 ‘한국근대 문화의 형성 과정’의 연구 성과도 집중적으로 소개되었다.


21세기에 들어서는 ‘한국학의 국제화’에도 힘을 기울여, 2000년 2월에는 중국 연변대학 조선문제연구소와 공동으로 ‘한·중 교류와 상호 인식의 자취’란 주제로 국제학술회의를 개최한 바 있으며, 2002년 6월에는 하와이대학 한국학센터(Center for Korean Studies)와 같은 해 10월에는 중국 북경대학 한국학연구중심과 학술교류협정을 체결하였다. 또한 하와이대학교 한국학센터가 기획하여 미국 내의 및 동아시아 연구자들에게 한국학을 교육시키는 프로그램인 Institute on Korean Culture and Society : Asian Studies Developement Program (ASDP)의 국내 개최를 지원하였다. 2002년 6월에도 이 프로그램의 후원 연구소로 참여하여 개최 기간 동안 후원하였다. 2001년 5월 24일에는 기존의 자료도서부를 국제부로 변경하고 국제간 학술교류와 그에 관련된 사항을 전담하도록 하였다. 그 후 2001년 11월 운영위원회의 심의를 거쳐 연구부는 연구기획부로, 편집부는 편집간행부로, 국제부는 국제교류부로 명칭이 변경되었다. 1980년에 연구소 최초의 공동연구사업으로 ‘다산사상茶山思想의 종합적 연구’(연구책임자 : 한우근)가 수행되었다. 1988년부터 한국학 분야의 오랜 숙원이었던 규장각 소장 자료를 이용한 대규모의 공동연구사업이 문교부의 재정적 지원을 받아 연구소의 주관으로 시작되었다. 이 공동연구사업은 국어국문학과 국사학을 중심으로 철학·사회학·인류학·음악·미술·과학사 등 한국학 전 분야의 전문연구자들이 참여하는 학제적 연구방식으로 추진되어 1993년까지 사업을 완료하였다.


1994년부터는 교육부와의 협의를 거쳐 연구소가 주관하는 대규모 공동연구사업의 명칭이 ‘고전작품 역주·연구 및 한국 근대화과정 연구’로 수정되고 교육부의 재정지원도 증가하여 근대화과정연구와 함께 규장각에 소장되어 있는 장편대하소설과 국어학 자료에 대한 역주·연구도 병행함으로써 연구사업의 폭이 확대되었다. 1997년 3월부터는 ‘『일성록』 기사내용 및 주요어의 전산화작업’이 서울대학교 발전기금의 지원으로 이루어졌다. 『일성록』은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관찬사료로서 분량이 방대하기 때문에 연구자들이 이용하는데 어려움이 많았으나, 이 연구를 통해 한국학 연구의 새로운 전기를 마련할 수 있었다. 1999년 12월부터는 한국학술진흥재단의 ‘중점연구소 지원사업’으로 ‘한국 근대사회와 문화의 형성 과정 연구’가 새로 시작되었다. 이 연구사업은 국사학, 국어학, 국문학 등 여러 학문 분야의 학제간 공동연구사업으로 새로운 한국근대사회상을 수립하는 것을 목표로 하여 6년간 3단계에 걸쳐 수행되었다.


연구소는 한국학전문 정기학술지인 『한국문화韓國文化』를 1980년부터 1년에 1호씩 간행하기 시작하였다. 『한국문화』는 연륜을 쌓아가면서 국어국문학과 국사학을 중심으로 한국학 여러 분야의 수준 높은 연구성과들이 발표되어 학계의 중요한 학술지로 확고한 자리를 잡아갔다. 연구소의 공동연구사업을 통해 많은 연구성과가 축적됨에 따라서 1995년 17호부터는 1년에 2회 간행함으로써 연간 20편의 논문을 게재할 수 있게 되었고, 규장각한국학연구원으로 통합된 이후인 2008년 41호부터는 계간지가 되어 연4회 발간하고 있다.1988년부터 국제사회의 한국에 대한 관심에 부응하고 해외의 한국학 학자들에게 국내의 연구성과를 알리기 위해 영문학술지 Seoul Journal of Korean Studies도 간행하기 시작하여 연구원 통합 전까지 18호까지 발간되었다. SJKS는 국내에서 편집·간행되는 가장 오랜 전통을 갖고 있는 한국학 전문 영문학술지로서 외국의 한국학 연구자들로부터 호평을 받았다.


함흥전도
왕조 발상지의 아름다운 풍경

한국학연구사업위원회와 한국학 장기기초연구사업

효제문자도
부끄러움을 아는 마음, 청렴함

한국학연구사업위원회는 서울대학교 내 한국학 연구비로 한국학장기기초연구과제와 각종 학술행사를 수행하도록 지원하는 기구이다. 이 위원회는 본래 연구처 직속의 ‘한국학연구사업운영위원회’였으나, 2002년 6월부터 한국문화연구소가 연구처로부터 이 사업의 출판·홍보·발표 등의 업무를 위탁받아 수행하여 왔다. 2003년 5월에는 한국문화연구소가 사업의 주관기관이 되어 연구소 산하에 ‘한국학연구사업지원실’을 신설했고, 2006년 규장각한국학연구원 통합 이후에도 본 위원회와 지원실 조직은 승계되어 계속 사업을 운영하였다. 본 위원회가 주관한 ‘한국학장기기초연구사업’은 우수 연구인력을 대상으로 한국을 이해하고 그 미래의 방향을 검토하는데 도움이 될 새롭고 다양한 시각의 연구과제들을 지원함으로써 한국학의 연구수준을 더욱 높이는 것이 목적이다. 주요사업은 ①연구 지원, ②출판 지원, ③학술대회 지원, ④국제교류 지원 등이다. 2001년에는 과제의 성격에 따라 지정과제와 자유과제로 구분하고, 연구참여자에 따라 단독연구와 공동연구로 나누어 연구비를 지원하였다. 2002년부터는 자유과제에 대한 연구지원을 지속하는 가운데, 지정과제를 특성화하여 ‘기초자료개발과제’로 명칭을 바꾸고 발굴과 정리가 시급한 한국학 자료의 연구에 대해서 지원하고 있다. 아울러 연구종료 후에 제출된 연구성과물은 서울대학교출판문화원을 통해 3종의 한국학총서(한국학모노그래프·한국학연구총서·한국학자료총서)로 간행하고 있다.


본 사업은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출범 이후에도 이어져, ‘개교 60주년 및 규장각 창립 230주년한국학 국제학술회의’(2006.5.30~6.2), ‘아시아 연구의 새로운 방향 : 국경과 탈국경의 경계에서’(2006.6.9~6.10), ‘일제하 한국과 동아시아에서의 검열에 관한 새로운 접근’ (2006.12.7.~12.8)등의 학술대회도 지원하였다.

근대정부기록류

'한국학 연구원'으로 확대 · 개편 추진

한국문화연구소는 서울대학교의 유일한 한국학 연구기관으로서 공동연구·자료 역주 및 정리·연구서 출판·정기간행물 간행 등 각종 사업을 활발하게 전개하였다. 연구소는 2003년까지 34년간의 축적된 연구 역량을 바탕으로 고립·분산된 서울대학교의 한국학 연구 역량을 통합하여 학제간 대형 연구 사업을 효과적으로 수행하기 위해 단과대학 단위를 탈피한 한국학 전문 연구 기관으로의 전환을 기획하였다. 이에 따라 2003년 5월부터 시작한 교내 정책연구과제인 ‘한국학의 종합적 연구를 위한 한국학학술원의 설립 방안 연구’를 통해 교내의 여론을 수렴한국학 장기기초연구사업의 지원으로 간행된 한국학 총서 시리즈한 구체적인 확대·개편안을 마련하였다. 2004년 12월에는 ‘서울대학교 한국학 학술원(가칭) 기획안’을 작성하여 새로 설립할 한국학 연구기관의 필요성, 설립 방안, 세부 운영 계획, 예상효과에 대한 구체적인 검토 과정을 거쳤다.


2005년 6월에는 이태진李泰鎭 소장을 위원장으로 하는 ‘규장각 및 한국문화연구소 발전 추진위원회’가 구성되어, 서울대학교 내의 한국학 인력의 효율적 활용을 통한 한국학 발전을 위해 규장각과 한국문화연구소 두 기구를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으로 통합하기로 결정한 후, 구체적인 조직과 운영계획을 논의하여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설립안’을 대학본부에 제출하였다. 이런 노력의 결실로 현재의 규장각한국학연구원이 출범할 수 있었다.

준천시사열무도

한국학 연구의
중심기관으로 재탄생

2006년 2월 1일 서울대학교 한국문화연구소와 서울대학교 규장각이 명실상부한 연구기관으로 발돋움하기 위해 하나의 기구로 통합되어 ‘규장각한국학연구원’이 출범하였다. 기존 규장각과 한국문화연구소가 가지고 있던 조직과 기능들이 하나로 통합됨으로써 규장각 소장 자료의 보존·관리 및 이를 바탕으로 한 연구·출판·교육·보급 등의 사업을 보다 종합적이고 효율적으로 수행할 수 있는 기반이 마련되었다는 점에서 본원의 설립은 한국학 연구의 발전에 획기적인 의미를 갖는다.

숙종대왕 어필

본원에는 소장 자료의 효율적 관리 및 한국학 연구 사업의 원활한 수행을 위해 정보자료관리부, 기반연구부, 기획연구부, 편집간행부, 교육·교류부 등 5개의 부를 설치하여 업무를 분담하도록 하였으며, 행정실을 두어 각 부의 업무를 지원하도록 하였다.


아울러 교내 한국학 장기기초 연구사업 등을 담당하는 한국학연구사업위원회와 한문강독 및 서예강좌 운영을 담당하는 자하서당紫霞書堂을 내부기구로 통합하였다. 연구원 전체의 운영에 관한 주요 사항을 심의하는 기구인 운영위원회를 두고, 출판간행사업, 국제교류사업, 연구사업 기획 등의 주요 사안을 논의하기 위해 각각 출판간행위원회, 국제위원회, 기획연구위원회를 구성하였다.

인문학연구사업

21세기 새로운 규장각을 향한 투자

2007년 기존의 교육·교류부의 국제교류 업무를 확대 수행하기 위하여 국제한국학센터가 개소하였고, 이와 동시에 학술행사 및 교육 프로그램 운영에 관한 업무를 주관하기 위한 학술교육부가 신설되었다. 국제한국학센터는 국제 학술교류의 창구로서 해외 기관과의 협력체계를 구축하면서 국내외 한국학 분야 학술교류를 활성화하는 한편, 학문후속세대의 양성을 위해 신진 연구자들의 교류 및 지원 프로그램도 확대해 나가고 있다. 2008년에는 ‘조선의 기록문화와 법고창신法古創新의 한국학’이라는 연구주제를 내걸고 인문한국(Humanities Korea) 사업단이 출범하여 관련 연구성과를 축적해 오고 있으며, 관련 학술행사 등의 사업을 수행하고 있다. 또한 일반 시민을 위한 대중교육의 일환으로 전시회와 금요시민강좌를 개최하고 있다. 전시회는 규장각의 대표자료를 소개하는 상설전시와 매 해 특정한 주제에 따라 관련 자료를 선보이는 특별전시로 나뉜다. 시민강좌는 2008년부터 한국학의 최신 연구성과를 전공학자의 강의를 통해 접할 수 있는 ‘규장각 금요시민강좌’라는 제목으로 기획되었다. 이 강좌는 관악구청과 학관협력사업으로 진행되어 지역사회 소통의 매개체가 되고 있으며, 강의 결과물은 ‘규장각 교양총서’로 간행되고 있다.

불씨잡변
규장각교양총서 신간

2011년부터 고문헌 보존수리 사업을 시작하여 손상 위험성이 있는 자료의 수리복원, 보존처리, 대체본 제작 등의 작업이 진행 중이다. 2013년에는 소장 자료의 활용과 연구 활성화를 통해 새로운 한국학 발전의 전기를 마련하기 위한 ‘21세기 신규장각 사업’을 시작하였다. 이 사업은 ‘신규장각 자료구축’과 ‘한국기록문화의 세계화’라는 두 가지 부문으로 나누어 연구과제 지원, 기초자료 구축, 학술행사 개최, 신진 연구자 초청 등의 다양한 사업을 기획·진행 중이다. 본 사업은 200여 년 전 정조의 과감한 투자로 오늘의 규장각이 있게 된 점을 본받아, 21세기 한국학의 토대를 강화하고 새로운 발전의 발판을 마련하기 위한 디딤돌이 되기를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