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컬로퀴엄

제70회 : 戰前 日本의 滿洲農業移民의 한 形態 – 天理村

등록일 : 2013.04.15 조회 : 124

안녕하십니까.

규장각한국학연구원에서

425일 목요일 오후 4시에 제70회 콜로키엄을 개최합니다. 장소는 규장각 1층 회의실(112)입니다.

이번 강연은 중국사회과학원 연구원이신

문춘미(文春美) 선생님께서

 

戰前 日本滿洲農業移民의 한 形態 - 天理村

 

이라는 주제로 발표해주실 예정입니다.

 

문춘미 선생님께서는 중국 연변대학교 사학과에서 학사학위를, 북경대학교 사학과에서 석사학위를 취득하셨고, 중국사회과학원에서 세계사 박사학위를 취득하셨습니다. 현재 중국사회과학원 세계사연구소에 부연구원으로 재직 중이시며, 규장각한국학연구원에 펠로우로 와계십니다.

 

만주농업이민정책이 실시된 시대적 배경과 구체적 진행 단계, 그리고 天理村을 중심으로, 天理教의 적극적 해외전도와 만주농업이민과의 연관성을 고찰할 이번 발표에, 관심 있으신 많은 분들의 참여 부탁드립니다. 아래에 발표 개요를 첨부합니다.

  

 

 

戰前 日本滿洲農業移民의 한 形態 - 天理村

 

文春美 (中國社會科學院 世界歷史硏究所 助理硏究員)

 

 

Abstract

 

만주이민사업은 1932년부터 1945년의 14년간, 식민지지배와 전쟁진행을 위해 농업이민형식으로 약27만 명을 일본국내에서부터 만주국에 송출한 국책이민사업이다. 만주농업이민정책과 사업전개에 따라 만주농업이민의 형태도 다양한데, 그 중에서도 종교단체인 天理敎가 만주에 세운 天理村이 제일 독특한 형태를 취하고 있다. 지금까지 만주이민에 관한 연구는 많은 성과를 이루었으며, 그 축적된 연구 성과를 통해 국책사업으로 만주농업이민을 추진하게 된 배경에서부터 붕괴까지의 전 과정을 쉽게 파악할 수 있다. 그렇지만 天理敎가 만주에 세운 天理村은 종교와 연관이 있다는 민감성과 자료상의 한계로 인해 일본학계에서 그다지 많은 연구가 진행되지 않은 상황이다.

1838中山みき의 신들림으로 시작되었던 天理教는 교파신도로서 일본의 대외팽창이라는 국책에 순응하여 침략전쟁에 적극적인 협력활동을 펼쳤다. 1934년부터 1945년까지 10여 년에 걸쳐 3차례 총2200명이 넘는 신자들을 만주국의 하얼빈에 보내어 天理村을 세웠다. 天理村의 이름生琉里는 제2眞柱(수장) 中山正善(1905-1967)에 의하여 지어진 것으로, 그 뜻은 새로 태어난 고향, 유리와 같이 아름다운 고향을 만들자라는 의미이고, 만주국 삼천만 중국인에게 영적 구제의 손을 내밀어 그들의 정신갱생의 실현을 위한 이상향을 건설한다는 것이다.

天理教事典<満州天理村에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天理村은 산업, 의료, 교육 등 각 분야에서 현지 사회에 공헌을 하였고 민중과의 융화를 추진함으로써, 일본의 국가권력 특히 군부와 결탁하여 현지로부터의 수탈을 시종일관시하였던 당시의 대기업과 이권을 노리는 자들과는 엄연히 다르다.” 天理教에서는 지금까지도 전쟁에 협력한 만주이민을 정부의 압력에 어쩔 수 없이 취할 수밖에 없었던 행동으로 변명하기에 급급하고 있다. 1945년 일본의 패망과 함께 소련과 중국인의 공격과 온역에 시달리다가 간신히 하얼빈의 天理村에서 일본으로 돌아온 사람은 1401, 사망자와 실종자는 804명에 달하였다. , 종교가 국책에 따라 전쟁에 협력한 사실은 부정할 수 없는 동시에 종교의 관여로 신자들을 포함하여 중국인들에게 말할 수 없는 불행과 고통을 강요하였다면 그것에 대한 깊이 있는 비판적 연구가 활발히 진행되어야 한다.

본 발표의 내용은 크게 네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다. 첫째, 국책으로서의 만주농업이민정책을 실시하게 된 시대적 배경, 둘째, 만주농업이민의 네 단계, 셋째, 天理教의 적극적 해외전도와 만주농업이민과의 연관성, 그리고 마지막으로 만주 天理村이 어떠한 곳인지 보다 구체적으로 알아보는 것이다.

 

문의) 규장각 학술교육부 880-58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