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요시민강좌

3번글 질문에 대한 답변 : ‘탐라왕자’에 대하여

등록일 : 2008.11.05 조회 : 82

앞 게시물 ifiwere님의 질문에 대한 답변입니다.

고려말 조선초에 탐라(제주도)를 다스린 ''왕자''라는 관직이 있었는지를 질문하셨는데, <조선왕조실록>, <고려사> 등의 역사 기록에 나오는 사실입니다.

제주도의 신화에 따르면 신선 세 사람이 땅으로부터 솟아나왔는데, 첫째를 양을나(良乙那), 둘째를 고을나(高乙那), 세째를 부을나(夫乙那)라고 하였습니다. 그 후손 3형제가 신라에 입조하자 왕이 가상히 여겨 장자에게 성주(星主), 둘째에게 왕자(王子), 막내에게 도내(都內:후에 都上으로 고침)라는 칭호를 주었습니다. 이들은 탐라의 토착 지배층으로서 백제와도 통교하였고, 고려 개국 후에도 조공을 바치니 성주, 왕자의 작위를 주었습니다.
이 칭호는 조선초까지 존속한 것이 실록에서 확인됩니다. 조선초기인 정종 2년(1400)에도 제주의 백백태자(伯伯太子)가 입조하여 공물을 바친 기록을 찾을 수 있고, 태종 4년(1404)에 이르러서야 성주, 왕자라는 이름이 참람되다고 하여 성주를 도주관 좌도지관(都州官左都知管)으로, 왕자를 도주관 우도지관(右都知管으로 개칭합니다.
제주도에 중앙에서 파견한 지방관이 파견되는 것은 태종 16년(1416)에 한라산 북쪽은 제주에 목사를 두고, 산의 남쪽을 양분해 동쪽에 정의현, 서쪽에 대정현을 설치해 현감을 둔 것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제주도는 고대부터 탐라국이라는 독립 정권이 존재했고, 신라와 고려에 복속된 이후에도 지방의 토착 호족층이 중앙조정으로부터 받은 작위를 세습하면서 지방분권적인 체제를 유지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제주도 서귀포시 하원동에 있는 ''탐라왕자묘''는 2000년에 제주도기념물 54호로 지정된 고려말, 조선초 무덤입니다. 비교적 근래에 발굴된 것으로서 읍지 등 문헌기록에 적힌 왕자묘의 소재지와도 위치상 잘 들어맞아서 주목을 받게 되었고, 발굴조사 결과 고위층의 무덤으로 밝혀졌다고 합니다.

이 정도로 기초적인 수준의 답변을 마치겠습니다.
더 자세한 사항은 <조선왕조실록>, <고려사> 등 연대기 자료를 더 검색해 보시고,
하원동 왕자묘에 대해서는 문화재지정을 담당한 제주특별자치도 측에 문의해 보시는 것이 좋을 것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