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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2회 : 60년 전 그들 사이에는 무슨 일이 있었는가? -이승만 대통령과 아이젠하워 대통령 사이의 영문편지 분석

등록일 : 2013.05.21 조회 : 109

안녕하십니까.

규장각한국학연구원에서

530일 목요일 오후 4시에 제72회 콜로키엄을 개최합니다. 장소는 규장각 1층 회의실(112)입니다.

이번 강연은 서울대학교 국제대학원 국제학과 교수이신

박태균 선생님께서

 

“60년 전 그들 사이에는 무슨 일이 있었는가? - 이승만 대통령과 아이젠하워 대통령 사이의 영문편지 분석

 

이라는 주제로 발표해주실 예정입니다.

 

박태균 선생님께서는 서울대학교 국사학과에서 학사를, 동 대학원에서 한미관계를 다룬 논문으로 석사와 박사학위를 취득하셨습니다. 현재 서울대학교 국제대학원 국제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시며, 한국학전공 주임을 맡고 계십니다.

 

최근 공개된 이승만 대통령의 영문편지를 분석하여, 1953년 반공포로 석방 사건 이면에 내포되어 있는 한미관계의 중요한 전환을 살펴보고 그 의미를 고찰할 이번 발표에 많은 분들의 관심과 참여 부탁드립니다. 아래에 발표 개요를 첨부합니다.

 

 

 

 

60년 전 그들 사이에는 무슨 일이 있었는가?

- 이승만 대통령과 아이젠하워 대통령 사이의 영문편지 분석

 

 

박태균(서울대 국제대학원 한국학전공 주임)

 

Abstract

 

  1953년 반공포로 석방 사건은 한미관계에 큰 획을 긋는 사건이었다. 1972년 하비브 주한미국대사는 아래와 같은 전문을 보냈다.

 

한미관계는 평온했던 적이 없었다. 사실, 강한 의견의 불일치나 양자에게 중요한 문제에 대한 상호간의 의심이 과거 20년간 한미관계의 주요한 면모였다. 이승만은 격렬하게 휴전협정을 반대했고 한국이 통일될 때까지 계속해서 싸우기를 원했다. 우리는 그가 공공연히 주장한 북진정책에 대해 두려워했으며, 반대했다. 서울에 있는 우리 대사관은 처음에는 박장군이 일으킨 1960(1961년의 오기: 필자)의 쿠데타를 반대했으며, 1963년에는 박이 선거를 갖도록 하기 위해 최고의 압력을 넣었다. 푸에블로호의 피납과 청와대 습격에 대한 우리의 대응의 차이는 박을 격노케 하였다.

 

  하비브 대사는 한미관계에서 중요했던 세 가지 사건을 예시로 들었는데 그 중 하나가 바로 반공포로 석방 사건이었다. 이 사건은 한국 사회에서 이승만 대통령이 공산주의에 반대하는 포로들을 자유 세계의 품에 안기도록 한 기념비적 사건으로 알려지고 있다. 또한 일부 연구자들은 이 사건을 통해 한미상호방위조약이 맺어질 수 있었다고 하면서 이승만 대통령의 외교력을 높이 평가하는 하나의 사례로 해석하고 있다.

  그러나 과연 이 사건에 대한 우리 사회의 통념은 올바른 것일까? 이 사건을 전후해서 한미 간에는 과연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이 사건이 발생한 후 20년이 지난 시점에서도 한미 간의 갈등에 대해 언급한 주한미국 대사의 전문에 이 사건이 언급된 것은 무엇 때문일까?

  이 사건과 관련해서는 미국의 대외관계(Foreign Relations of the United States)” 자료집을 통해 그 실상이 일부 알려지지 않았지만, 이 사태가 얼마나 심각했는가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 밝혀지지 않았었다. 이런 의미에서 볼 때 최근 공개된 이승만 대통령의 영문 편지는 당시 상황에 대해 보다 실증적, 객관적으로 접근할 수 있는 중요한 근거를 제시해 준다.

  이 사건은 반공포로라는 의미보다는 정전협정을 통해 한국전쟁이 새로운 국면으로 전환되는 과정에서 발생한 사건으로 보아야 한다. 이승만 대통령은 아이젠하워 행정부의 정전협정추진에 대해 적극적으로 반대했다. 그리고 정전협정을 조인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 반공포로의 석방을 단행했던 것이다. 이 시점에서 아이젠하워 행정부는 이미 정전협정을 맺는 대신에 한미상호방위조약을 맺을 것을 이승만 대통령에게 제안한 이후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이승만 대통령이 원했던 것은 정전협정을 맺기 이전에 상호방위조약을 맺는 것이었다. 그러나 아이젠하워 행정부는 이승만 대통령의 요구를 수용하지 않았다. 만약 그 요구를 수용할 경우 공산군 측에서 정전협정 조인을 거부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반공포로 석방이 이루어졌고,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이에 대해 분노했다. 반공포로 석방 다음날 이승만 대통령에게 보낸 편지를 보면 이 점이 잘 드러나고 있다. 그리고 한국에 특사를 보내 이승만 대통령을 설득했다. 그러나 사태는 모두 끝난 것이 아니었다. 이승만 대통령은 미국의 요구에 마지못해 동의했지만, 한국정부와 미국 정부 사이에는 동상이몽적 관계가 지속되고 있었다. 이는 정전협정의 조항과도 관련된 것이었다. 바로 90일 이내에 정치협상을 통해 정전협정이 무효화된다는 조항 때문이었다.

  결과적으로 볼 때 이승만 대통령은 이 사건을 통해 자기가 이루려고 했던 것을 이루지 못했다. 한미상호방위조약은 미국 정부의 의도대로 정전협정이 체결된 이후에 조인되었다. 또한 한국군의 작전지휘권이 유엔군사령관 휘하로 가는 데에도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아마도 이승만 대통령이 얻을 수 있었던 가장 큰 성과는 주한미군의 철수 가능성을 봉쇄했다는 점일 것이다. 그리고 그 대가로 나타난 결과는 한미 간의 심각한 불신관계였다.

 

 

문의) 규장각 학술교육부 880-5827